제주 4·3 사태를 어린이 눈높이에서 다룬 최초의 그림책
<지상에 숟가락 하나>, <순이 삼촌> 등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비극, 특히 제주 4·3 사태에 천착해 온 소설가 현기영 선생의 대표작 ‘마지막 테우리’가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 <테우리 할아버지>로 다시 태어났다. <테우리 할아버지>는 4·3 사태를 어린이 눈높이에 맟춰 다룬 최초의 그림책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금기의 영역에 묶여 있던 4·3 사태는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사과를 얻어 냈다. 지난해 현기영 선생의 대표작들이 영어로 번역 출간되었고, 4·3을 다룬 영화 ‘지슬’이 각종 해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으며, 2014년 2월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4·3을 주제로 한 미술전이 처음으로 열릴 예정이다. 최근 ‘4·3 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또 한편에서는 4·3을 폄훼하고 왜곡한 역사교과서가 채택되는 현실에서 우리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4·3사태를 어떻게 들려줄 것인가? <테우리 할아버지>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책이다.
손자 세대를 위해 쓴 ‘테우리 할아버지
현기영 선생의 ‘마지막 테우리’는 4·3 사태를 다룬 대표적인 소설일 뿐만 아니라 우리 단편문학 역사에 빛날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한평생 남의 소를 돌보며 살아온 노인의 내면과 회상을 통해 4·3의 기억과 상처를 어루만지는 이 이야기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고치기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현기영 선생은 어린 손자에게 4·3에 대해 들려주겠다는 마음으로 ‘마지막 테우리’를 과감하게 고쳐 썼고, 그림에 맞춰 원고를 여러 차례 손보았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 실린 해설을 통해 본문에서 미처 이야기하지 못한 4·3 사태의 역사적 배경과 전말을 설명함으로써 함께 읽을 부모님과 어린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아름다운 풍광 뒤에 숨은 제주의 아픈 역사
작가는 오래전 어느 늦가을에 한라산 밑 초원을 헤매다가 우연히 한 노인과 마주쳤는데, 그는 4·3의 대참사 이후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고 외따로 지내며 소를 돌봐 주는 마을 테우리였다. 그의 외로운 눈빛, 소 떼 가운데서 말을 잃고 살아가는, 눈빛마저 소의 눈을 닮은 그 노인의 시선에서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을 발견한 것이다. <테우리 할아버지>는 이처럼 소를 닮은 노인의 시선으로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을 돌아보며 그 뒤에 숨겨진 가슴 아픈 역사를 담담히 들려준다.
이야기는 한라산 오름에 있는 평화로운 목장의 풍경에서 시작된다. 막 겨울이 찾아온 목장에서 한 할아버지가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제주도 사투리로 소를 기르는 사람, 즉 테우리인 그는 홀로 조그만 움막에 살며 마을 사람들의 소를 대신 키워 주는 일을 했다. 겨울이 되자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소를 데려갔는데 테우리 할아버지의 친구는 아직도 암소와 송아지를 데리러 오지 않고 있다. 평소에도 아파서 드러눕기
일쑤인 친구를 걱정하던 할아버지는 불현듯 오래전 자신들이 겪었던 일을 떠올린다.
육이오 전쟁이 일어나기 전, 테우리 할아버지와 친구가 젊었던 시절의 일이다. 남한과 북한이 하나의 나라를 만들려 하지 않고 각각이 따로 나라를 세우려고 하자 섬 사람들이 반대를 했다. 그러자 군인들이 총을 쏘며 마을을 불태웠고,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가 몸을 숨겨야 했다. 할아버지의 친구 역시 그때 몸을 다쳤던 것이다. 옛일을 생각하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깬 할아버지는 친구의 암소와 송아지가 사라지고 없는 것을 발견한다. 어느새 사방이 어두워지고 세찬 바람과 눈송이가 날리는 가운데 할아버지는 소들을 찾아 헤매다가 어디선가 친구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를 듣게 되는데…….
제주의 빛과 바람을 고스란히 담은 그림
<테우리 할아버지>의 또 다른 주인공은 제주의 자연이다. 탁 트인 사방에 펼쳐진 넓은 초원과 크나큰 곡면으로 드리워진 하늘, 그리고 계절마다 빛깔을 달리하는 나지막한 오름과 그 위에서 소들이 풀을 뜯는 풍경은 제주가 가진 아름다움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림 작가 정용성은 어둡고 비극적인 역사적 순간들을 과감한 색과 붓놀림으로 형상화하는 것 못지않게 제주의 사계절을 공들여 되살려 냈다. 이렇듯 부드럽고 너그러운 자연을 닮아 풍속이 순박하다는 평판을 들었던 제주 사람들이 비극적인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아이러니는 4·3 사태의 비극성을 더해 준다. 책의 맨 앞과 뒤에는 오름의 풍경이 담겨 있다. 거대한 초록빛 봉우리로 솟은 봄의 오름과 순백의 눈으로 가득 채워진 한겨울의 오름, 그 대조가 눈부시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으로 담아 낸, 오랜 내공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작가 소개>
글 현기영
1941년 제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버지’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현대사의 이면을 다룬 깊이 있는 작품을 써 왔으며 만해문학상, 신동엽창작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등을 받았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마지막 테우리>, <순이 삼촌>, <지상에 숟가락 하나>, <변방에 우짖는 새> 등이 있습니다.
그림 정용성
1968년 제주도 서쪽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화가로 활동하면서 ‘제주 4·3미술제’, ‘탐라미술인협회전’, ‘제주항쟁기념 역사미술전’, ‘제2회 평화미술제’ 등 여러 단체전과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지금도 제주의 바람을 맞으며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그린 책으로 <숨비소리>가 있습니다.





